2009 recap

2009년이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한해가 바뀐다는 것은 사실 물리적 시간의 흐름 이상의 의미를 주곤 한다. 너무나 바쁘게 그리고 빠르게 지나갔던 2009년을 잠시 돌아볼까.

1월 – 3월: 2008년의 후폭풍. 내 인생에 대한 나의 선택과 그에 대한 신뢰.

3월 – 6월: 황금어장 목장 식구들과의 화려하고 행복한 전성기

6월 – 9월: 회장 재임 후 청년부 섬김에 더욱 박차를 가함. 너무나 은혜롭게 치뤄졌던 수련회

9월 – 12월: 수련회 이후 더욱더 교회섬김에 집중. 그리고 과로와 피로로 인한 건강에 이상신호. 지친 몸과 마음을 타호에서 달래고 6주간의 잊을 수 있는 연극 ‘The Gift’ 공연준비.

그리고 앞으로의 일들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지금…

이 짧은 글에 담을 수없을 만큼 다이나믹 했던 2009년. 앞으로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하는 근본적인 인생의 진로를 고민했던 한해가 그렇게 끝나가고 있다. 아직도 많이 추상적이긴 하지만 2009년 한해 동안 찾아낸 비전의 실마리들은 정리해보자.

어디에서 – 하나님께서 부르신 어느 곳에서든. 나라와 지역과 상관없이.
누구와 – 힘든 사람을 돕기위해 누릴수 있는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과
무엇을 – 교회섬김에 최선을 다하며, 믿음으로 가정을 지키고, 직간접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는 삶

인생의 동역자를 만나는 일은 이제껏 나의 소극적이고 폐쇠적이었던 자세를 인정하고 변화를 줄 것을 결심했기에 앞으로 좋은 기대를 해본다. 때론 너무 필요이상으로 관계에 있어서 진지했던 모습을 버리고 조금 더 가볍게 마음을 먹기로 했다. 순수하고 진실된 마음이 있다면 시작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너무 선긋기에 바빴던 것 같다. 이제는 빗장을 풀리라.

비전에 관해선 아직 좀 어려운 것 같다. 직업이 전부는 아니지만 직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사실이다. 부끄럽지만 현재 나의 직업과 진로에 대해 아직도 확신이 없다. 지금의 진로를 하기엔 나의 은사와 성향이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놓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편안하고 안락하고 또 타인에게 인정받는 직장을 고수하는 나의 세상적 가치관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올 한해 깊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부분이다. 과연 내가 안락한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보다 경제적으로 환경적으로 어려운 상황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섬기며 도우며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있다. 이러한 고민의 결론은 항상 ‘지금 주어진 매일의 삶에 충실하면서 to know Him and to make Him known 을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현재에 충실하지 않고 올바른 가치관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멀리내다보되 주어진 상황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 믿는다.

아직도 풀어나가야 할 부분이 너무도 많은 나의 삶이지만 2010년도에는 보다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리라. 뜨겁게 교회를 사랑하며, 순수한 연애도 꿈꿔보고, 잃었던 건강도 되찾고, 관계의 폭도 넓히고, 직장에서 더욱 열정적으로, 그리고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그런 2010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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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ift

나는 아직도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독과 각본을 맡았던 뮤지컬 ‘bless me’를 잊을 수가 없다. 워싱턴 지구촌교회 30주년 기념 행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26세 철없는 한 청년에게 주어진 막중한 임무는 내 20대 기억 중 가장 소중한 기억 중에 하나로 남게 되었다. 어마어마한 제작비(?)와 6개월이란 긴 준비기간, 그리고 매회 700명 객석이 만원이 되었던 두차례의 공연과 앙코르 공연까지. 실로 한두문장에 담을 수 없는 값진 추억이 되었다.

나는 연극이나 뮤지컬을 제대로 관람한 적도 배워본 적도 없다. 그 흔한 브로드웨이 쇼나 라스베가스 쇼도 보지 못한 사람이다. 연기 역시 별로 경험이 없다. 중고등학교때 대학때 교회에서 잠시 무대에 서본 것 외에는. 글 쓰는 것은 원래부터 좋아했었다. 이민오기 전에는 잠시나마 소설가의 꿈을 꾸어보기도 했었다.

“bless me” 이 후에 몇년의 시간이 흘렀을까. 몇년만에 다시 연극 각본을 쓰게 되었다. 제목은 “the gift”. 사실 이 제목은 각본을 쓰고난 후에야 정해지게 되었다. 나에게 주어졌던 짧은 기간동안 매일 매순간 무엇에 관해 쓸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었지만 딱히 스토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적적으로 하루, 그것도 반나절 만에 16페이지에 달하는 각본을 미친듯이 쓰게 되었고 서너번의 수정 끝에 20여 페이지의 각본이 완성되었다. 당초 예상했던 20분 연극의 두배가 되는 분량이었다.

반나절 만에 proof read도 채 하지 못하고 마감시간에 맞춰 원고를 제출하는 작가의 심정으로 각본을 들고 연극팀을 처음 만난 그 날을 기억한다. 자신도 채 읽어보지 못한 각본이 걱정되서 발로 쓴 거라며 내밀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약 6주의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각본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완성이 되었고 내일 모래면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 열리게 된다. 그 동안 너무나 수고한 연기자들과 연출팀들의 수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과 지켜본 사람들만이 아는 비밀이다.

내 과거경험에 비해 이번 연극에 나의 참여도는 매우 적다. 각본을 쓴 것 외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감독과 조연출도 다른 친구들에게 다 맡겼다. 나로서는 조금 의외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만큼 먼 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하였다. 하지만 나는 사실 이 연극에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다. “the gift”는 내가 살아온 지난 3년동안 내가 씨름했던 삶의 고민들이 깃들어있다. 20대후반에서 30대초반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갖고 있던 인생과 비전에 관한 고민, 성숙으로의 여정과 자기성찰에서 나온 생각들, 다양한 관계를 통한 인생의 경험들… 결국 앞으로 남은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when, where and with who 에 관한 질문에 대한 고찰이 그대로 담겨있다.

연극을 관람하는 모든 사람이 다 찾아낼 수 없을 만큼 많은 의미를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담아놓았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 의미를 찾아내는 것 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의 선물을 찾아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작가로서 너무 만족하고 기쁠 것 같다.

그 ‘선물’이 무엇인지는 12월 20일 오후 1시 뉴비전교회에 오면 받을 수 있다. ^^

해운대, 그 쓰나미같은 감동의 물결

미국극장에서 가장 처음 본 영화는 ‘주유소 습격사건’이었다. 허름하고 지저분했던 볼티모어의 한 극장에서 함께간 4명의 친구들과 미국친구와 함께 온 한 그룹과 함께 추위에 떨며, 그러나 박장대소를 하며 보았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로 본 한국영화는 ‘태극기 휘날리며’였다. 굉장히 실망스러운 영화였다. 흠, 실망스럽다고 하기엔 너무 많은 노력이 깃든 영화같으니 그냥 많이 아쉬웠다고 해두자. 그리고 손꼽아 기다렸다가 목원들 모두 끌고가서 봤던 ‘용가리’는 애국심으로 덮어두면 아름다울 것 같다.

‘해운대’는 내가 facebook에 trailer를 올렸을만큼 나오면 꼭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 그런데 근처 극장에서 ‘해운대’를 상영한다 매우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목장식구들과 시간을 맞추기 위해 예배후 목장모임을 마치고 극장의 반 이상을 가득채운 한인들과 함께 코엑스에 있는 CGV를 방불케하는 장관을 이루며 영화가 시작되었고 영화가 끝났을 때는 이미 마음 한구석에 찐한 감동이 밀려와 있었다.

일단 나는 영화를 보고나서 굳이 작품성을 평가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쓸데없는 비평은 자기 주관적인 글로 돈을 버는 영화평론가들이 이미 많이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영화는 재미있거나 재미없거나 (중립적인 입장을 좋아하시는 분들을 위해선 그저 그랬다 까지) 둘 중 하나 아닌가. 그래서 나는 내가 본 감동을 나누고자 한다.

일단 나 역시 큰 기대 없이 영화를 봤던 것을 시인하겠다. 외계인 침략, 바이오테러 등으로 인한 인류멸종위기를 다룬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선 자연재해로 인한 인류대환란같은 장르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자연재해는 문제의 근원자체가 인류의 능력밖에 나와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deep impact’, ‘day after tomorrow’, ‘아마게돈’ 등 disaster movie의 대명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떤 특정한 자연재해의 위력을 통한 시대적 비극의 해결이다. ‘해운대’ 역시 이 공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내가 경의롭게 여기는 점은 메가쓰나미라는 자연재해도 기대이상으로 훌륭하게 표현했지만 (내가 반지의 제왕을 본 세대라는 것을 잊지말라) 그 쓰나미의 스케일 보다 드라마적 요소가 더 크게 가슴에 남았다는 점이다.

부산이라는 도시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소개, 야구장에서 ‘마, 마, 마’와 같은 짧은 응원구호처럼 짧은 말 한마디에 깊은 마음이 심겨져있는 투박하고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 그 휴향도시 속에 펼쳐지는 다양한 계층의 삶의 모습들. 이렇게 정겨운 한국인의 정서를 억지스럽지 않고 오히려 굉장히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이 감동을 주기위한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다시말해, 헐리우드식 드라마적 감동을 어색하게 도입한 것이 아니라 한국정서에 걸맞는 한국인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로 뒷받침이 되었다 (물론 영화의 옥의 티였던 박중운의 파트는 제외하겠다). [주의사항: 약간의 스포일러로 이어집니다]. 아픔이 있지만 건실한 청년들의 소박한 사랑이야기,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철없는 불효자와 그를 향한 이해할 수 없는 우리 한국 어머니의 각별한 모성애, 아직 어딘가에 분명히 남아있을 (희귀존재가 되어가는) 순수하고 정의로운 지방청년과 세상물정 모를 것 같은 새침한 도시처녀의 여름휴가처럼 짧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작은 아버지와 조카, 이혼한 부부의 대립과 갈등, 아픔 등 한국정서를 가진 우리가 모두 공감할 수 있는 그리운 한국 정서들이 모두 그 안에 있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이제 좀더 자극적인 것을 원한다. 더이상 디즈니가 말하는 해피엔딩이나 헐리우드식 권선징악 (악인은 주인공과 싸우다 실수 또는 자신의 악의로 인해 1분전까지 자신을 죽일듯 패던 주인공이 다시 살려주려고 안간 힘을 쓰지만 끝내 아주 잔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무분별한 책임전가식의 권선징악 엔딩)은 식상해한다. ‘departed’나 ‘sixth sense’ 같은 충격적인 반전, 아니 반전도 모자라서 반전의 반전을 바란다. 그러나 ‘해운대’는 정석적인 앤딩공식에 충실했다. 적당한 해피앤딩과 권선징악과, 가슴찡한 관계의 회복이 있었다. 그리고 무의미하게 죽음을 미화시키지도 않았다. 아름답고 정의로운 죽음또한 과장되지 않았기에 큰 감동을 주었던 것 같다. ‘나(우리)의 죽음은 굉장히 희생적이이어서 아름답게 희화되야해’라는 억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이 훌륭한 연기와 억지스럽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통해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또한 절대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코메디요소였다. 영화의 절반을 웃음으로 관람했고 나머지를 코끝 찡해지는 감동으로 보았던 것 같다. 어둡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영화를 한층 밝고 감동스럽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희극적이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영화의 고질병은 억지웃음을 자아내는 각본이다. ‘아 저런 의도로 웃길려고 했던거구나’라고 제작자의 의도를 느낄 수 있을 만큼 너무나 억지스러운 개그가 많은 영화의 옥의 티로 남았던 걸 기억한다. 그러나 해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지어는 대재앙 속에서도 희극적 요소를 연결해나갔고 울면서 웃을 수 밖에 없는 역설적인 장면들을 훌륭하게 연출하였다. 한국인만 웃을 수 있는 개그코드부터 굉장히 세련된 개그까지 (솔직히 어떤 부분들은 한국영화에서 그동안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센세이션이었다) 많은 웃음을 자아내는 영화였다.

곧 ‘2012’라는 세계 대재앙을 다룬 영화가 개봉할 것인데 고작 한국이란 쬐끄만 나라에 그것도 부산이라는 쬐그만 도시에 있는 해운대라고 하는 쬐그만 피서지에 덮치는 쓰나미로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해운대’의 감동은 정말 쓰나미 수준이었다. 어차피 한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큰 파도나 몇만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대쓰나미나 그 속에 있는 사람들에겐 모두가 결국 똑같은 자연대재앙인 것이다. 결국 쓰나미라는 대재앙을 통해 다시 느끼게 되는 사랑, 후회, 회복, 상실, 웃음의 이야기들이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어쩌면 이런 뻔한 일상의 감동들이 그동안 우리 삶에서 너무 고갈되어 있진 않았나 모르겠다. 점점 매말라가는 광야같은 인생 속에 이런 소박하고 따뜻한 감동이 한줄기의 시원한 비처럼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해운대’라는 영화는 CG처리가 2프로 부족했네 하는 정도로 여겨질 수준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운대’는 실제 해운대 이상의 규모를 통해 한국의 훌륭한 (그러나 잃어가고 있는) 정서적 유산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현 사회의 아픔들에 대한 이상적이지만 아름다운 답안을 제공하는 가슴뭉쿨한 감동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런 영화가 계속해서 많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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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함과 느끼함

오늘은 동족상잔 수준의 글을 쓸까 한다. 대한민국의 씩씩한 남자로 태어나 30여년을 살아온 내가 오늘은 또 다른 남자들에 대한 냉철한 비평을 하려한다. (나의 원래 성격은 긍정적에다 낙천적이기까지한데 이상하게도 왜 글을 쓸때는 비평하는 글이 잘써지는 걸까.. 흠)

세상엔 참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창의력과 창작력으로 인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비슷한 사람들은 종종 있지만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을 정확히 분류시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가끔은 이해를 돕기 위해 좀 극단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남자와 여자이다.
세상엔 두 종류의 남자가 있다. 담백한 남자와 느끼한 남자.

담백하다는 것을 음식으로 말하자면 끝맛이 깔끔한 한국 또는 일본음식 쯤 되겠다. 느끼하다는 것은 아마 기름진 중국요리나 이탈리안식 치즈요리라 할 수 있겠고.

이런 간단한 전제로 남자를 들여다 본다면 담백한 남자와 느끼한 남자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실제로 설문조사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를 알수는 없지만 체감으로 느껴지는 비율로만 본다면 50%는 확실히 넘는 것 같다. 나름 담백한 인생을 고수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는 정말 답답한 상황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마치 맛있게 삼겹살을 구워먹고 나면 얼굴에 기름이 붙어 번들번들해지는 그런 찝찝함과 비슷할 것이다. 물론 사람의 성격이나 천성만 갖고 편견을 갖거나 폄가절하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느끼한 부류의 남자들의 대부분의 의식구조와 그 의식구조의 결과물로 들어나는 행동양식들은 정말 나로 두주먹 불끈 쥐게 만든다.

물론 남자의 느끼함을 측정하는 기준은 객관적이기 보단 주관적인 부분이 더 압도적일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내 블로그이기 때문에 내 주관으로 얘기하는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거라 본다. 어쨌든, 신기하게도 느끼한 남자들은 느끼한 외모를 갖고 있다. (아, 물론 담백하지만 느끼한 외모때문에 오해받으며 살고 있는 소수 남성분들께는 심심한 사과를 표하는 바이다.) 일단 외모가 느끼하면 눈빛이 느끼하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꼬리가 처지는 나의 눈을 보며 속쌍카풀 정도는 있어도 괜찮았을텐데 하며 살짝 아쉬움을 느낀 적도 아주 가끔은 있었으나, 다시 태어나도 나는 그대로 무쌍카풀의 액면을 갖고 태어나고 싶다. 그래, 눈빛만 느끼한 것도 넓은 아량을 동원해보면 어떻게 이해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느끼한 말투와 느끼한 행동, 불필요하며 어딘가 어색하고 짙은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스킨십 (보통 여자에게, 그러나 남자에게도)은 정말 당장에라도 그 손목관절을 북두신권으로 마비시켜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느끼한 남자의 근본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을거라 추측해본다.

1) 여자에게 잘보이고 싶은 남자의 원초적 본능? (창조질서적 시각)
2) 남성 호르몬에 의한 생리적 원인이 초래한 행동적 결과? (의학적/생물학적인 시각)
3) 별다른 이유없이 그냥 그런 성격으로 태어나서? (운명론적 시각)
4) 생활환경이나 과거의 경험들을 토대로 습득된 성격이라서? (환경적 시각)
5) 실제로 느끼한 방법을 통해 성공적인 관계형성의 경험이 있어서? (관계경험적 시작)
6)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적 트랜드라서? (문화역사적 시각)

등등. 리스트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느끼함의 근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나와 같이 자유롭게 공존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왠지 비극같이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물론 나도 건장한 한 남자로서 이성에 관해 비슷한 욕구 (왠지 비인간적 표현인 것 같아 깨림직 하지만 당장에 이보다 더 적합한 단어가 떠오르지가 않기에…)와 목적, 목표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의도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방법에 있는 것 같다. 건장한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봤을때 느끼는 호기심이나 관심은 창조주가 만드신 얼마나 아름다운 현상인가. 그러나 관심과 사심, 그리고 흑심에는 미미하나 명확한 차이가 있듯이 이성을 향한 모든 마음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의도가 순수한가 아닌가에 따라 그 사람이 담백한가 느끼한가가 결정되는 것 같다. (의도는 순수하지만 표현은 느끼할 수도 있고, 의도는 불순하지만 표현은 담백하게 포장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늘은 극단적으로 생각해보는 날이기 때문에 순수한 의도는 순수하게 들어난다고 가정해보자.) 성숙한 남자라면 모든 생각과 결단과 행동에 대해 경솔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매사 신중하며 지혜롭게 행동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마음에 어떠한 요동이 있다해서 쉽게 들어나는 것은 솔직하다거나 자연스럽다기보다는 미숙함에서 나오는 실수일 것이다. 적어도 어른이 되는 길목에 서 있는 사람들에겐 말이다. 물론 조선시대처럼 마음을 꼭꼭 숨기고 가슴앓이 하자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고 당당하되 성숙한 사람답게 행동하자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느끼함이 나에게 무슨 피해를 주길래 치를 떠느냐라고 물어올 수 있겠다. 사실 나에게 살갗에 와닿는 치명적인 피해는 없다. 그러나 분명히 정신적 피해는 있다. 일단 공의롭고 정의롭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내가 이 모든 상황을 참아주고 있지 않는가?! 나에게 하나님께서 인내의 훈련을 주시기 위해 이런 상황을 주셨다고 말하기엔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신 분 같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왜 담백하게 살지 못하는가? 남자들이여, 제발 담백한 삶을, 순수한 삶을 추구해보자.
세상이 한 열배로 아름다워지지 않겠는가?

give and take take take take.. and take.

사람들은 자신에게 시급하거나 중요한 필요가 있을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정작 누군가가 도움을 필요로 할때는 자신의 우선순위를 먼저 돌아보고나서 결정하는 것 같다. 만약 우리의 삶을 give and take 방식으로 점수를 매겨본다면 우리는 아마 give 보다는 take를 훨씬 많이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그건 아마도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는 훈련이 안되어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naturally we have tendency to put ourselves in the very top priority in every circumstance.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 할 수는 없겠다. because it absolutely takes nothing in trying to stay selfish. 하지만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단 한번이라도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suppy and demand의 양이 불균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도움을 받으려는 사람에 비해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모순적인 말이 되겠지만, “나 한사람이 먼저 바뀌면 돼” 라고 말하는 것은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굉장히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볼땐 인간이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이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merely for the sake of goodness가 아닌 불가항력적인 그리스도의 선한 영으로 덮어야지만 이 세상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를 온유하고 겸손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매일 다져지고 깍여지고, 그 감사함으로 인해 한번더 나보다 남을 사랑해보겠다고 의지적으로 실천해보고, 또한 그러한 반복적 성화과정을 통해 더이상 희생적인 삶을 흉내내는 사람이 아닌 진실된 마음으로 헌신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변해갈 수 있다고 믿는다.

만약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give and take take take 의 삶을 산다면
누군가는 give give give and take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난 늘 내가 전자가 될까 겁이 난다 그래서 내가 꼭 후자가 되길 간절히 기도하고 노력한다.
전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기엔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한량없이 크기 때문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많은 것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깊은 개인주의와 인본주의에 뿌리내린 신앙의 모습이 들어날 때 마다 숨통이 막힌듯한 답답함을 느낀다. 우리의 신앙에는 모순이 너무도 많다. 많은 사람들이영적인 권위와 신령한 카리스마를 원하면서도 정작 그러한 권위의 대상에게는 순복하지 않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영적인 권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름부어주시는 것이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순복(순종함으로 복종)하는 것은 ‘우리’라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개개인의 몫이 아닌가. 이러한 이중적인 신앙의 자세가 결국은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낳고 그 모순은 결국 불순종의 영으로 나타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영적리더는 철저한 자기부인과 순종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아직도 나의 권리, 나의 자유, 나의 이익, 나의 신념, 나의 경험, 나의 방법, 나의 편안함을 고집하는 리더가 있는 곳에는 소망이 없어 보인다. ‘나는 매일 죽노라’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을 되내이며 그 삶을 실천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청년들은 어디있는가. 언제부터 우리가 순종에 설득력을 전제조건으로 달기 시작했는가. 나의 의견이 수렴되고, 나의 목소리가 전달되고, 내가 설득되고 내가 이해되고 내가 동의해야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언제부터 ‘매일 죽노라’를 실천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납득할 수 있고 만족하는 결과에 한해서만 ‘나는 매일 죽겠다’라고 말 하는 것에 무슨 능력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대공황 이후 최고의 경제위기라는 어려움 속에도 아직도 너무나 부유한 삶을 유지하고 있는 이 곳에서 우리는 너무나 깊은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져있다. 기존형식과 관습에 익숙해져 더이상 독창성이 없이 반복되는 신앙의 습관 속에서 점점 은혜의 감격은 사라지고 나의 존재만 점점 더 커져만 간다. 하나님이 주신 공동체에를 위해 말없이 소리없이 흔적없이 자신을 희생하는 아름다운 신앙의 정신보다는 ‘me myself and i’ 라는 ‘내’가 중심에 서 있다.

섬김은 귀하다. 그러나 생색내는 섬김은 안하느니만 못하다. 진정 자신의 위치에 대해 사명감을 느끼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사명감과 부르심의 회복을 위해 골방에서 부르짖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그런 나를 이해하고 받아주지 못함을 불평하고 있는가. 모든 사람이 사랑과 관심과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들의 결여상태를 더이상 핑계삼으며 자기타협을 할수는 없다. 적어도 공동체에서 세움받은 영적리더라면 더더욱.

왜 강력한 도전과 훈계의 말씀이 이 지역 청년들을 변화시키 않는가? 모두가 쓴소리 듣는 것에 얼굴을 찌뿌리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권면을 선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중요하고 공의와 위엄과 정의로 신판하심도 동일하게 중요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양면적 속성 중 어느 한쪽이라도 외면하거나 어느 한쪽만 선호한다면 우리 신앙에는 불균형이 찾아 올 수 밖에 없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 내 자아가 너무 크다. 내 의지가 너무 강하다. 내 고집이 너무 세다. 말씀의 훈계를 담을 곳도 내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의도에 순종할 자세도 수용할 곳이 없다. 내 안에서 비만을 겪고 있는 내 자아에 대한 철저한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나쁜 음식은 잘라내고 좋은 양식으로 채워나가야 한다. 땀흘리며 뛰며(봉사와 섬김) 노폐물을 빼어내고(철저한 회개) 교만의 체지방(매너리즘, 행위주의, 율법주의, 개인주의 등)을 태워없애야 한다. 때론 맛없는 음식도 먹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아이와 성인의 차이인 것이다. 영적건강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단 것만 좋아하면 비만이 올수도 있다. 언제까지 내가 좋아하는 것만 달라고 보채는 아이로 머물 수는 없다.

나는 매일 죽노라. 이 고백이 우리의 삶에서 철저히 고백되길 간절히 간절히 원한다.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구세주의 흘린 보배피로서 나를 정케 하소서.

요즘들어 내 삶에 가장 시급한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새 룸메이트를 찾는 일이다. 2명의 룸메이트 중 한명이 결혼으로 인해 집을 나갔기 때문이다. 같은 교회 다니는 (그것도 같은 청년부 임원들) 형제들로 구성된 우리 집에는 늘 교회사람들로 북적인다. 특히 내가 맡고 있는 목장의 목원들은 네번째 룸메이트들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도 그런 것이, 이 집으로 이사오기로결정한 이유부터가 바로 교회 근처에 이사를 가서 많은 청년부의 지체들을 위해 집을 오픈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사실 나는 실제로 내가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의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만 생각해서 혼자 방을 구해서 나갔다면 아마 지금보다 매달 200불 (일년에 2400불)을 더 세이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을 고수하는 이유는 이 집이 많은 사람들에게 편안한 친교와 휴식의 장소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우리 집을 가장 많이 방문하는 우리 가족같은 내 목장식구들과, 한국의 워십댄스팀인 pk로 북적거렸던 3박4일의 추억들, 그리고 그 외에 우리 집을 다녀간 많은 사람들.

동부에 있었을때부터 우리 집은 늘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 가족모두(특히 어머니) 손님접대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지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건너 건너 아는 사람들까지 우리 집에서 묵어가곤 했다(그래서 pk도 워싱턴을 거칠때 우리집에서 묵었다는). 심지어는 집에 문을 잠그지 않고 살때도 있었다. 아무나 와서 쉬고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 그다지 훔쳐갈 고가품도 없었기에).

그런걸 보고 자라서인지 나 역시 손님을 초대하는 것을 좋아하고 즐긴다.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사람을 초대하고 접대하고 섬기는데에서 오는 기쁨을 안다면 돈의 액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어차피 그를 위해서 주님께서 직장을 주신 것이 아닌가.

솔직히 기도가 많이 부족했지만 뒤늦게 나마 열심히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게 주신 이 보금자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섬길 수 있도록. 좋은 룸메이트를 만나서 같은 마음으로 집을 오픈하고 섬길 수 있도록. 룸메이트로서의 만남이지만 오래 남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만남이 될 수 있도록.

오늘 첫번째 사람이 방을 보러 온다. 주님께서 인도해주시기를.